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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색중인 것에 대한 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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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의 식탁을 친구의 답장으로 읽는다. Heroines of the Cliff-Sea Power 머리를 어지럽히는 질문이 있어 낯가리는 독서모임 채팅방에 메세지를 남겼다. 친구가 뭔지 모르겠다고. 나 친구가 없는 거 같다고. (지금 생각해보니 뜬금없는 질문으로 채팅방 분위기를 흐려서 미안하다. 그 방에 있는 친구들은 친구가 아니냐? 으유~) 같이 여행갈 수 있는 친구들이 있나? 편안한 차림으로 만나 술을 마실 수 있는 친구가 있나? 생각해보면 없는 거 같아서. 친구들의 답이 시차를 두고 하나씩 도착했다. “맛난 거 같이 먹고 얘기도 도란도란 들어주고 가끔 정신차리라고 욕해주면 친구지” “지금 곁에 있는 사람들 같아요 같이 보낸 시간도 참 소중한데 현재 내 옆에 있어주는 사람들” ”그럼 다음 모임 주제로 들고오세요. ” “뒷북이지만 수진쓰가 얘..
옆에 누가 앉았으면 해? 작년 7월 망원동 책방 영업을 임시중단했다. 3개월, 길면 5개월 내에 리브랜딩을 마치고 연남동으로 이사 할 예정이었다. 인생에 계획대로 되는 일은 정직하게 울리는 아침 알람 뿐… 여기엔 쓸 수 없는 몇가지 문제들 때문에 공사가 1년이나 지체됐다. 올해안에 오픈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늦어지던 공사에 속도가 붙었다. 오늘 드디어 책방 가구가 들어왔다. 조립 전 상태로 자재들만 들어온 상태라 감은 안오지만 이사온 실감은 난다. 이번주 목요일이면 설치가 끝날텐데 제발 문제없이 잘 설치 됐으면 좋겠다. 잔업들도 조금 더 속도를 내서 진행중인데 가장 오랜 시간을 들였음에도 아직 제자리걸음인 일이 하나 있다. 책 진열방식을 정하지 못했다. 지금까지 운영해온 두 서점은 손님들이 서가를 어려워하지 않도록 에세이, ..
그걸 알게된 사장은 뭐라고 말했을까 The Fablemans-John Williams 활성화되어 있는 유일한 단체카톡방에 한 친구가 질문을 보냈다. "팀원이 똑같은 실수를 반복해서 화가날 때...어떻게 하나요?" 가장 오래 일한 선배S가 답했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① 능력에 맞는 업무인데 단순 실수라면, 솔직하게 피드백한다 ② 능력보다 조금 어려운 업무라면, 실수가 없을 때까지 함께 진행하고 실수가 사라지면 위임한다 ③ 능력보다 많이 어려운 업무라면, 업무를 재배치하거나 교육을 다시 한다. / 실수하지 않을 때까지 여러번 알려주는 편인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감정을 빼고 오은영 교수님처럼 어린아이에게 알려주듯 매일이 새 날처럼, 이일이 새 일처럼 알려주려고 노력합니다. 만약 태도의 문제라면 화를 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인간입니다…“..
잔인한 생활의 굴레도 끝을 아는 사람에게는 잠깐 타고 내리는 대관람차 같은 게 된다. Ocells-Todi Soler 쌀방. 방안 가득 쌀이 산처럼 쌓여있는 방. 외갓댁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보이는 방은 쌀방이었다. 그 방에 물건은 살을 푸는 ‘되’ 하나 뿐이었다. 동갑내기 친척과 키만큼 높게 쌓인 쌀산을 미끄럼틀처럼 타고 놀며 쌀을 온데만데 흩뿌리며 놀았다. 쌀에서 뒹굴다 나오면 얼굴에 뽀얗게 쌀가루가 묻어있었다. 외갓댁은 쌀을 포대가 아니라 방 한칸에 쌓아 두고 먹을만큼 쌀농사을 크게 짓는 집이었다. 고양이 손도 빌린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일손이 많이 필요한 농사에 온 식구들은 모내기철, 수확철마다 동원됐다. 농번기에 더위를 먹는 사람은 있었어도 죽은 사람은 없었다. 일은 한겨울에 일어났다. “날이 많이 추운데 가서 밭을 한번 둘러보고 오라“는 할아버지의 말에 할머니는 밭을 보러 나갔..
여긴 조금 구석 Memoria-Cesar Lopez 평소라면 안할 짓을 하며 휴일을 보냈다. 희로에 40분이나 기다려서 들어갔고 메뉴 아홉개를 먹었다. 하이볼 반잔에 취해서 아이스크림이며 지렁이 젤리며 이상한 것들을 먹으면서 집까지 걸어왔다. 오는 길에 바닥에서 지렁이를 봤고 먹던 젤리 하나를 지렁이 옆에 두고 왔다. “친구해~~~”하고. 메모도 사진도 쌓이기 시작하면 정리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매일 보기 쉬운 곳에서 올려두는 건 빨랫대를 보여주는 기분이고. 여기도 누군가가 볼 것을 상정하고 쓰는 곳이지만 어쩐지 여긴 조금 구석 같고. 그리고 이곳까지 들어와 나를 읽는 사람이라면 조금 마음을 놔도 되지 않을까.(아니야 정신차려) 를 봤고 올해 본 영화들의 필름스코어를 모아둔 플레이리스트가 1시간을 넘겼다. 플레이리스트..
대가를 치르길 바라는 마음과 대가 없는 호의를 바라는 마음 사이에서 일 많은 하필 이번달 전세 대출 대환 때문에 관공서와 은행을 분주히 오갔다. 관공서에선 혼났다. 내가 원하는 서류를 받으려면 이 서류를 써야하는데 아직도 이걸 안했냐며 혼이 났다. 어깨와 등짝에 구멍이 숭숭 난 후줄근한 회색 티셔츠가 신경쓰였다. 멋으로 낸 구멍이 관공서에서는 가난이 낸 구멍처럼 보인다. 서류를 쓰는동안 직원은 옆자리 동료와 연예인 누구누구가 자살로 죽었는지 아닌지를 논쟁했고 핸드폰 검색까지 동원했다. 나는 답을 알고 있었지만 혼이 났기 때문에 조용히 서류를 썼다. 사실 나는 혼날 이유가 없었다. 5월 초 한낮 기온이 28도다. 서류를 챙겨 도착한 은행에서는 이번달 전세대출 할당랑이 마무리되었으니 다른 지점을 찾아가야한다고 했다. 4월에 방문했을 때 5월에 와야한다고 말한 담당자다. 어느..
자신을 수습하는 사람의 글에선 땀이 난다. 날은 덥고 일은 더디던 여름날, 사무실 아래에 있는 바에 맥주를 마시러 들렀다. 두런두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사장님께 기타를 배우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운동하기‘처럼 늘 새해 다짐 리스트에 오르는 ‘연주하기’. 배우고 싶다는 말은 진심이었지만 작심은 아니었는데(?) 다정한 사장님은 선생님을 소개해주셨다. 며칠 뒤 같은 바에서 만난 선생님은 안 입은 것이나 다름없는 민소매에 반바지, 쪼리를 신고 어깨에 자전거를 둘러메고 나타났다. 이것이 그의 첫 인상이다. 7년 전 일이다. 나는 내내 선생님이 신기하다. 선생님은 한다. 술을 마시다가, 잠깐 들렸다가 공연을 만들고, 연주를 하고, 앨범을 만든다. 여러 개의 세션, 솔로 앨범, 그것을 위한 합주들까지. 어떻게 저 일이 다 진행되고 있는걸까. 하고 싶..
후줄근한 옷을 입고 마주 앉아 북마크는 그 양이 너무 많아져 폴더별로 정리되어있다. 순서는 자주 보는 순이다. page (넷플릭스, 유튜브 등) daily reading (주요 뉴스) Productivity(생산성 도구,,) webzine (건축/디자인/문화예술 분야의 웹진들) curation (책 큐레이션에 참고하는 페이지들) bookshop (좋아하는 서점들) study (왜 있는지 모르겠다. 거의 안열어봄) blog (아, 이거 이야기하려고 시작했는데!) identity (브랜딩 작업에 참고하는 페이지들) visual inspiration (환기할 때 보는 시각자료 페이지들) refresh (NASA 홈페이지) HTW(How To Wear 줄임말, 국내외 편집샵) publishing (출판 관련 페이지들) sweet home (..
틈새의 금빛을 따라서 가을 옷에 가을 옷 겹쳐 입으면 겨울 옷이지. 생활은 대비 없이 겨울을 맞았다. 어째서 행사를 매주 하겠다고 했을까. 기획전, 북토크, 낭독회. 잘하고 있는 건가, 이거 다 무슨 의미일까. 무슨 소용일까. 친구는 믿음 같은 거 없이도 하는 게 진짜라고 말했지만 무언가를 믿지 않으면 나아갈 힘이 없다는 사실만 선명하게 알게 될 뿐이었다. 해가 갈수록 좋기만 했던 일들에 틈이 생긴다. 틈새마다 의심과 회의가 들어찬다. 5년 차를 맞은 산책, 보살피는 손길마다 낡은 흔적들이 보이고 도움을 받아 수리해야 하는 것들이 부쩍 늘었다. 특히 컵과 접시는 돌이킬 수 없이 깨지는 경우가 많아 새로 구매하는 일이 잦았다. 깨진 기물들은 대부분 처분했지만 그중 조금 이가 나간 다관은 쉽게 포기가 되지 않아 몇 해 동안 갖고..
너의 이름으로 시작될 수 있는 무수한 사건을 기다리게 돼 9월의 노트는 이미 10월임에 당황하며 침대에 누워 정리하고 있다. 한 달의 메모를 정리하는 일이 어쩐지 더 하찮아 보이는 날에는 이제 이런 건 그만해야겠다고 생각한다. 9월은 만남이 잦았다. 북토크 뒤풀이(술), 본가 다녀온 일, 인왕산 산행, 전 직장 동료와 식사, 동료를 떠나보내며 송별회 1(술), 동료를 떠나보내며 송별회 2(술), 잠시 한국에 들어온 친구를 반기며 환영회(술), 영화 관람 후 정동길 기행,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프리즈, 포트폴리오 홈페이지 제작. 심드렁하게 노트를 정리하다 보면 이렇게 많은 일들도, 오래 품고 싶었던 마음들도 다 흐릿해져있음에 아쉬운 마음이 든다. 흐릿해져 아쉬운 것들은 이런 것이다. 친구 H의 책 출간을 축하하며 조력자의 마음으로 북토크 모더레이터를 맡았던 일...
부딪힐 곳이 없는 비는 소리를 내지 못하고, 투명한 물도 깊어지면 바닥이 보이지 않는다. -8월의 노트들 8월 노트들은 책상에 앉아서 쓰다가 자야 할 시간이 돼서 누워서 갈무리한다. 이달엔 카메라를 바꿨다. 마음에 드는 사진을 찍게 되면 사진에 대한 칭찬에 겸손 대신 감사로 답할 수 있을까. 작은 똑딱이를 7년 동안 썼다. 자주 들고 다니며 찍어본 덕분에 눈과 손에 익은 구도도 생겼고 그렇게 찍은 사진이 즐거운 일을 많이 가져다 주었다. 조그맣게 낡은 모습을 보고 있으니 같이 고생한 동업자를 보는 기분이다. 전시 두 개를 보았다. 그리고 N/A에서 열린 용진 씨의 전시 . 논픽션 홈 전시에선 차갑게 반짝이는 질감의 가구와 흐드러진 모양의 조명이 대비되어 생기는 이질적인 느낌이 좋았다. 가구는 건물 같고 조명은 그 틈새에 핀 야생화 같았다. 울트라라이트에선 낯선 사람들과 여름밤의 분위기 탓에 오랜만에 설레는 ..
한쪽에서만 열리던 문에 관한 이야기 자취 생활이 길었다는 이야기에는 본가가 어디인지를 묻는 질문이 짝꿍이다. ‘좋은 도시에서 자랐네요!’라는 감탄에는 본가에 가는 횟수를 묻는 질문이 짝꿍이다. 대체로 이 짝꿍들의 의미는 ‘할 말 없음’이다. 앞으로 수십 번 더 마주하게 될 ‘할 말 없음’의 상황에서 화제를 돌려보고자 오늘의 글을 남겨두는 바이다. 계산을 해봤다. 대략 한 달에 한번, 일 년에 열두 번, 1회 방문 시 적절 숙박 기간은 1박 2일, 이걸 100세 시대 계산법에 넣는다. 극단적인 셈법이지만 어찌 됐든 겨우 3년이 나온다. 부모님이 살아 계시는 동안 함께 있을 수 있는 날이. 어떤 이는 셈의 결과로 안도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과 함께 나는 아쉬워하는 쪽이라는 걸 깨닫는다. 생각하기도 전에 ‘무려’보다는 ‘겨우’를 떠올렸으니까. 7..
7월의 노트들. 스물세 개의 동그라미를 그렸다. 7월의 노트는 7013 버스를 기다리며 갈무리한다. 본격적으로 다시 일을 시작했다. 프로젝트도 많고 체계 정리가 필요해 노션 페이지를 설계하는 데에 시간을 많이 보냈다. 만들어둔 것이 도움을 주었으면 좋겠다. 일을 다시 시작하면서 굳게 다짐한 것은 잘하고 싶은 욕심에 나를 다 소진시키지 말자는 것이다. 개인적인 목표와 일정들도 노션으로 관리해볼까 고민했지만 일을 할 때를 제외하고는 가능한 효율의 반대 편에 있기로 했다. 한 달을 보내고 보니 그 방법들 모두 내 몸의 경계를 넘지 않는 것들이었다. 마셜 매클루언은 미디어를 몸의 확장이라고 했다. 그의 글을 생각하고 보니 왜 그렇게 지쳤는지, 하면 할수록 왜 더 외로워졌는지 알 것 같기도 하다. 7월엔 습관처럼 SNS를 열어 초대받지 않은 사람의 방에 마구 ..
과거형의 애정표현으로 알게 된 것 오랜만에 좋아하는 술집에 들렀다. 술을 잘 못해 자주 못가는 것이 아쉽다. 주량을 늘릴 수 있다면 최대한으로 늘려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곳이다. 골목에 있는 작은 곳이지만 깨끗하고, 좋은 음악이 있고, 정중하고 적당히** 친절한 사장님이 있다. 이 세 박자가 만드는 분위기가 좋다. 둘 또는 홀로 조용히 머무는 손님이 많아, 공간은 종종 서로를 배려하는 자기장으로 가득찬다. 이곳에서는 안심하고 술을 마신다. 오이 소다를 마셨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양쪽에 손님이 찼고, 바 너머에 계시는 사장님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양쪽 손님은 고작 오이 소다 한 잔으로 온몸이 불타고 있는 이 인물이 아랫층 책방 운영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름 모르는 손님께 이런 이야길 들었다. 책방을 좋아했다고, 즐거웠다고..
Bookshop Moving Diary. 3 저 둘을 바다에 버려요. 작년 여름부터 지지부진 1년을 고민한 도면을 확정했다. 공간 디자인은 세 사람이 모여 진행했다. (아래는 고집쟁이 고래 두 명이 공간 디자이너 등을 터트리는 소리입니다.) A 디자인 언어가 통일돼야지~ 그리고 여기!! 여기!! 여기!! 딱 떨어져야 됩니다. B 운영 기획을 받쳐주는 디자인이면 좋겠어요!!! 형식과!! 내용을!! 일치!! 시킬 수 있는 게 우리 프로젝트의 장점이지요!!! C 저 둘을 바다에 버려요. 아무도 못찾게. A는 건축가, B는 기획자(나), C는 공간 디자이너다. 6년간의 운영 경험이 이번 설계에 적극 반영됐으면 했다. 설계부터 직접 할 수 있는 팀이니까 기획을 반영한 설계가 핵심이라고 생각했다. 매달 한 작가를 소개하는 작가전의 구성을 담을 수 있는 전시 공간, 행사를 진행할 때 ..
Bookshop Moving Diary. 2 정답없는 오답노트(설계편) 새로운 프로젝트를 기획하면서 가장 먼저 하고 싶었던 것은 실수를 정리해보는 것이었다. 그런 용도라면 고등학교 시절 쓰던 오답노트와 다르지 않은데 정확한 답이 없다는 점이 다르다. 아무도 채점 못하는 시험이다. 고심해 풀고 과정을 잘 기록해두고 싶다. 잘하고 싶은 마음은 욕심이 아닌 줄 알았다. 후회하는 일을 반복하지 않는 것, 이전의 나보다 나아지는 것이 정답없는 오답노트의 목표다. 생각날 때마다 메모장에 하나둘 쓰기 시작한 오답들이 예상보다 굉장히 많아(ㅜ_ㅜ) 설계편/기획편/운영편으로 나눈다. 설계는 기획, 운영과 달리 한번 정해지면 바꾸기가 어려우니 가장 먼저 써보기로 한다. 설계라기엔 너무 거창하고 공간 구성편 정도. 1. 바닥 마감 현재 책방으로 사용하는 공간은 가구가 급하게 들어가는 바람에 바..
Bookshop Moving Diary. 1 7월 8일 2016년부터 꼭 채워 6년을 운영한 책방의 이사 일정이 결정됐다. 이사할 건물은 회사의 새로운 프로젝트로 올해 9월 완공을 목표로 공사중이다. (이 건물은 여러 개의 집과, 서점, 입주자를 위한 커뮤니티 시설로 구성되어 있다.) 7월은 현재 책방 운영을 마무리하는 일 뿐만 아니라 이사할 건물의 운영 기획, 프로젝트 전체의 브랜딩도 함께 준비해야한다. Bookshop Moving Diary의 첫번째 이야기는 왜 단순한 책방 이사가 아닌가?에 대한 글이 되겠다. 책방은 단독 상업 공간으로도 존재할 수 있지만 프로젝트 일부로서, 그와 맥락을 함께해야하는 (골치 아픈) 상황 속에 있다. 그래서 책방만 똑 떼어 브랜딩이나 운영을 계획할 수 없다. 하려면 전사 브랜딩을 해야한다. 일이 커진다. 이런 문..
6월의 노트들. 정원과 의자와 주문 살면서 이런 일도 겪는구나 싶었던 몇개월을 보내고 6월 한달은 쉬었다. 모처럼 생긴 휴가에 여행을 가라는 조언을 많이 들었지만 가고 싶은 곳도, 갈 힘도 없었다. 그간 모은 돈을 전세금에 모두 넣었으니 여행지는 집이 된 셈이다. 알람없이 눈이 떠질 때 일어났고 부지런히 식사를 만들었다. 오후에는 가방 없이 책을 챙겨 외부인들이 부러 찾지 않는 장소에서 책을 읽었다. 해가 지면 운동을 했고 자기 전까지 오후에 읽던 책을 마저 읽었다. 하루가 이런 일만으로도 끝난다는 게 이상했다. 6월에는 책을 읽는데 방해가 되지 않을만한, 전곡이 좋아 다음곡으로 넘기지 않아도 되는 앨범 세 개를 계속 돌려 들었다. Emil Gilels -Edvard Grieg: Lyric Pieces Lars Danielsson - Ta..
5월의 노트들. 안녕을 두 번 말하면 ‘n월의 노트들’은 한 달 동안 적은 맥락없고 두서없는 메모의 모음이다. 월초가 되면 아이폰 메모장에 그 달의 이름으로 노트를 만든다. 그 노트가 늘 맨 위에 올 수 있도록 고정시켜두고 먹다가, 읽다가, 걷다가 생각나는 것들을 적는다. 사실 5월은 간간히 욕이 있었는데 후에 지웠다. 5월은 사랑이 훨씬 많았으니까~ 5.?? Schumann: Davidsbundlertanze, Zhu Xiao Mei 다비드 동맹 무곡집, 주 샤오메이 5.3 갑갑해질 때마다 대각선에 앉은 친구의 얼굴을 몰래 본다. 무슨 힘든 일이 있는지 모니터와 씨름하는 얼굴을 보면 웃음이 난다. 눈이 그렁그렁. 다소 엉망인 일들을 힘겹게 뒤로하고 저녁 식사를 했다. 5.10 퇴사 의사를 전하는데에 부끄러운 마음이 드는 이유를 계속 생각한..
4월의 노트들. 그냥 있는 것을 더욱 있게 하라 4.1 잔잔하게 남은 코로나 후유증. 한달은 회복에 신경쓰자. 4.7 예정과 다른 종류의 일들을 하고 있다. 초반에는 기대했던 일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불안했지만 새로운 어려움을 마주하면서 불안은 무기력함에 가까운 모양으로 바뀌었다. 노골적인 미움. 모호하고 어지러운 상황 속에서 나아갈 동력이 안에도 밖에도 없다. 잘해보자 마음먹고 출근했다가 울면서 퇴근한다. 평소라면 아무렇지 않게 지나칠 말들도 굳이 붙잡아 부러 아프게 듣는다. 4.8 편지를 받았다. 4.14 또 편지를 받았다. 이번엔 뜻밖의 사람에게. 4.15 처음으로 원고료를 받고 글을 써보았다. 우습고 부끄럽다. 4.16 서점을 운영했을 땐 4월이 되면 이날을 준비했지. 매장에 근무하는 동료들에게는 후원으로 받은 노란 뱃지를 나눠주고, ..
새벽부터 노인처럼 편지를 쓰시는 선생님께 선생님 안녕하세요. 편지를 받아들고 목련 부럽지 않게 활짝 웃었습니다. 전해주신 스피노자의 말을 여태껏 중얼거리고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에는 옆에 있는 사람의 마음을 따라가고 싶은 마음이 들어 있어서, 서로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과 마음이 제멋대로 닮아간다.” 어느새 선생님께 저의 가난한 마음이 전해진 것 같아 부끄러운 마음과 가르침이 필요한 때를 눈치채고 찾아와 주신듯해 감사한 마음이 한데 엉켜있습니다. 겨울에 드린 선물을 봄에야 뜯어보셨다고요. 선물을 묵혀두었다 뜯는 친구가 이야기해준 적이 있습니다. 어떤 마음으로 무엇을 골랐을까 궁금해하는 시간까지를 선물이라 생각하고 싶다고요. 한 계절을 기다려 선물을 뜯는 선생님의 성정을 닮아갈 수 있다면 내내 포장지가 씌워져 있는 삶도 뒷짐 지고 흐뭇하게 바라볼..
목적지는 승차지점으로 일주일간의 격리를 마치고 일상 생활을 시작했다. 잠을 못잘 정도로 고열에 시달린게 무색하게 갑자기 증상이 사라졌다. 급히 사라진 증상들은 잔기침과 새 풍선을 부는듯한 뻑뻑한 들숨을 남겼다. 한 두시간 적게 일하고 있는데도 집에 돌아오면 노트 가득 적어둔 할일을 베고 눕는다. 오늘 본 친구의 글처럼 나는 요즘 해결 수 없는 상황 속에서 해결할 필요가 없는 것들에 강박적으로 매달린다. 기기마다 흩어져있는 기록을 완벽하게 정리하려고 한다든가, 구글 캘린더의 모든 일정을 양식에 맞춰 정렬하려고 한다든가. 한숨 돌린 후 들여다 보면 애쓴기력이 역력하다. 저녁을 먹으러 간 중국집 뒷자리에 앉은 남자들은 룸살롱 이야기를 자랑처럼 늘어놓는다. 곧 식당을 열 예정이라는데 맘카페를 잘 관리해야한다고 말한다. 음식을 먹는 ..
3월의 노트들 3.3 합류하기로 한 곳에 첫 출근 했다. 출근하기 전까지 많은 일들이 있었다. 상황은 달라졌고 혼란스럽지만 할 수 있는 것들부터 한다. 해본다. 합류를 결정했을 때 쓴 글을 꺼내보며 마음을 다잡는다. 3.7 여러 권의 책을 숙제처럼 들고 돌아왔고 몇개의 말들을 후회하느라 새벽까지 깨어있었다. 말을 좀 아껴라 수진아. 투자를 받지 않기로 결정하면서 내가 참여하기로 했던 프로젝트들이 무산되었다. 현재 시점에서는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찾고 해내는 것 밖에 할 수 없는데, 몇몇 분들은 내가 출근하지 않기를 바라고 있는 것 같다. 그 생각을 나에게 거리낌없이 말할 때마다 외로운 마음이 든다. 걷고 움직이다보면 다시 명랑한 마음이 되긴하지만 당분간은 외로운 기분을 자주 맞이하게 될 것 같다. 3.8 번역 프로..
시간이 만들어준 낭만 마지막이 될 줄 몰랐던 5년 전 만남을 끝으로 나는 이따금 그를 떠올리기만 했다. 가벼운 몸과 간소한 차림새, 점심시간마다 챙겨오던 소박하고 맛있는 도시락, 일하는 자리에 앉아 커피를 만들어 마시던 몸짓들, 혼자 간 씨네큐브 옆자리에서 우연히 그를 만난 일. 종종 생각이 났고 연락처도 있었지만 연락할 이유가 없었다. 그에게 연락이 왔다. 오랜만에 만나기로 한 우리는 현재의 상황을 꽤 낭만적인 것으로 여겼다. 함께 일했던 사이지만 우리는 어떤 곳으로도 연결되어 있지 않았고, 오랜시간 서로를 떠올리기만 하는 건 인스타그램이 생긴 후론 영화에서나 있는 일이 됐으니까. 씨네큐브에서 본 영화가 무엇이었는지, 영화를 보고 나와 순대국밥을 먹었는지 아닌지, 각자가 원하는 모양으로 지니고 있던 기억들을 맞대보며 많이 ..
덕분에 지난 시간을 조금은 긍정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연초부터 큰 변화들이 있었다. 12월 중순, 메일로만 연락을 주고 받던 어느 대표님께 프로젝트 합류 제안을 받았다. 기쁜 일이었다. 오랜시간 그곳의 이야기와 만듦새가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대표는 단순한 업무 메일에도 언제나 정성스럽게 회신했고 그곳의 이야기가 만드는 사람을 닮은 것이었구나 생각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합류 제안이 나의 나이, 학력, 경력도 모르는 채로 진행된 것이었다는 점, 그간 해온 일들과 몇개의 글로 가늠된 것이라는 사실에 나는 더 들떴다.(물론 고만고만한 나의 상황을 다 아셨겠지만) 제안을 받은 후 가소롭게 떠다니는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자주 걸었다. 새롭게 꾸린 팀과 도모중이던 일을 두고가야한다는 아쉬움, 5년 간 사업처럼 일궈온 일에 대한 미련, 사람을 잘못보신 게 아닐까하는 걱정(..
겨울을 지나는 방법을 여러 개 배웠다. 2021년 한 손에 잡힐듯 작게 느껴지는 한 해다. 지난 12월, 안식월 가능하다면 안식년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했던 그 버스정류장에 갈 때마다 일할 수 없을 지경으로 지쳐있었던 것이 무색하게 느껴진다. 그만큼 올해는 건강하게 부지런히 앞으로 나아갔고 겨울을 지나는 방법을 여러 개 배웠다. 나는 이제 일렁이지 않는 물결을 더 이상 심심하다고 느끼지 않는다. 수련하는 마음으로 살고 싶다. 겨울을 지나는 친구들을 기다릴 수 있을만큼. ⠀⠀⠀⠀⠀⠀⠀⠀⠀⠀⠀ 일 새로운 동료들을 채용하고 팀을 만들었다. 일의 체계를 만들고 관리자로서 팀을 운영해볼 수 있었다. 건강 필라테스 개인 레슨을 등록했다. 일주일에 이틀은 레슨 이틀은 러닝, 가끔 수영도 했다. 일을 시작한 이래 가장 좋은 체력과 컨디션을 유지했던 해였다. 여..
대안이 아니라 그 자체로 답이 될 거예요. 살면서 가장 많은 사람을 만난 해였다. 시선이 머무는 시간, 앉고 일어나는 몸짓에서 생각보다 많은 것을 읽을 수 있다는 것에 놀라며 나의 모양은 어떤지 자주 들여다보았다. 어떤 사람은 다시 마주하고 싶지 않기도 했고 어떤 사람은 나를 마주하고 있는듯 했다. 같은 모양을 발견할 때마다 같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그 시절 홀로 애쓰는 내가 보여서 자꾸 우는 마음이 된다. 그럴 때마다 속으로 응원한다. 우리가 계속 걸으면 그 선택지는 대안이 아니라 답이 될 거라고. 그 사람에게 보내는 응원이 그 시절의 나에게도 가닿는 기분이다. 꽃다발의 대안이라기엔 너무 아름다운 채소다발이죠. 두 분의 생활도 대안이 아니라 그 자체로 답이 될 거예요. 문제 앞에 늘 진취적으로 답을 구하는 모습 멋집니다. 응원해요. 2..
종종 열쇠가 자물쇠보다 빨리 도착하기도 한다. 언젠가 어떤 사람이 책을 많이 읽으면 무엇이 달라지냐고 물었습니다. 산책길에서 본 구멍이 여러 개 뚫린 현수막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냥 저렇게 구멍이 나는 것 같다고, 나 자신으로 빼곡했던 사람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조금씩 구멍이 나고 바람이 들듯 다른 사람이 드나들어도 되는 사람으로 변하는 것 같다고요. 내 공간은 점점 작아지는데 이상하게 넓어지는 기분이 든다고요. 책방에서 책을 보는 손님들의 뒷모습을 보면 애틋한 마음이 됩니다. 자신을 버릴 용기를 낸 사람들의 모양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야기는 나에게서 멀어지는 방법으로 어떤 자리를 만들어줍니다. 새로이 생긴 자리는 어떻게 쓰일지 모르겠습니다. 나를 확장하기 위한 자리로, 타인이 들어와 앉을자리로, 혹은 무용한 채로 남아있을 수도 있습니다. 8월의 ..
동거 제안을 어떤 이유로 거절할까 고민했다. 어색한 동생과의 동거 제안을 어떤 이유로 거절할까 고민했다. 12년 전이 마지막이었다. 얼굴도 이름도 달라져있는 동생. 동생 이름은 시안이다. 새 이름이 입에 붙지 않아 앞머리만 탈색한 모습을 보고 ‘갓파쿠'라고 부르기로 했다. 시안의 엄마는 나의 막내 이모다. 이모가 시안을 데려다 준 날 이모에게 처음으로 이야기했다. 어릴 때 외갓댁에 가면 거실에 널려있는 고추들을 피해 이모 방에 들어가서 책과 비디오들을 훔쳐봤다고. 내가 지금 하는 일에 영향을 미친 사람이 있다면 아마 이모일 것 같다고. 어떤 인터뷰에서 기억하고 있는 창문을 그려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나는 책과 비디오가 가득 쌓여있는 이모 방의 창문을 그렸다. 자취 경험이 없는 무려 2000년대생 시안에게 동거인으로서 기대하는 바는 없었다. 그런..
태고의 시간들 태고의 시간들: 시간, 공간, 존재를 초월한 대화 우리 곁에는 늘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손 가득 두툼한 소설들, 두 시간 남짓한 영화들, 매일 들려오는 뉴스들, 시간을 잊은 채 나누는 친구와의 대화까지. 우리에게 이야기는 왜 필요한 것일까요. 왜 이야기를 쓰느냐는 질문에 폴란드의 한 소설가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이야기를 짓는다는 건, 내 생각으로는 영원한 작업인 것 같다 인간은 스스로가 한정된 시간을 살아가는 '유한한 존재'임을 명백히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시간과 그 변화의 과정을 다른 이들에게 전달해야 할 강한 필요성을 실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야기'란 결국 '언어'만큼이나 오래되고 고전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 Olga Nawoja Tokarczuk 가장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