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모색중인 것에 대한 노트

대가를 치르길 바라는 마음과 대가 없는 호의를 바라는 마음 사이에서

일 많은 하필 이번달 전세 대출 대환 때문에 관공서와 은행을 분주히 오갔다.

관공서에선 혼났다. 내가 원하는 서류를 받으려면 이 서류를 써야하는데 아직도 이걸 안했냐며 혼이 났다. 어깨와 등짝에 구멍이 숭숭 난 후줄근한 회색 티셔츠가 신경쓰였다. 멋으로 낸 구멍이 관공서에서는 가난이 낸 구멍처럼 보인다. 서류를 쓰는동안 직원은 옆자리 동료와 연예인 누구누구가 자살로 죽었는지 아닌지를 논쟁했고 핸드폰 검색까지 동원했다. 나는 답을 알고 있었지만 혼이 났기 때문에 조용히 서류를 썼다. 사실 나는 혼날 이유가 없었다.
 
5월 초 한낮 기온이 28도다. 서류를 챙겨 도착한 은행에서는 이번달 전세대출 할당랑이 마무리되었으니 다른 지점을 찾아가야한다고 했다. 4월에 방문했을 때 5월에 와야한다고 말한 담당자다. 어느 지점이 여유가 있는지는 알 수 없다고 했다. 다른 지점을 찾아갔다. 분명 다른 지점인데 대답이 같았다. 만기 상환이 한달 밖에 안남았는데 이를 어쩌지. 두배나 올라버린 변동금리의 전세대출을 연장해야된다고 생각하니 이상 기온을 걱정하던 자신이 우스워졌다. 이번생은 노후자금 없어 앓다가 죽든 이상 기온으로 죽든 둘중 하나다.

멍하니 앉아있는 잠깐동안 직원의 얼굴에 내 근심이 물들었다. 이 사람들도 일하는건데 이제 그만 징징거리고 일어나자, 다른 대책을 마련해야지, 옅은 결심을 하고 일어나려는 찰나 직원이 내 일정이 촉박해보이니 급하지 않은 건을 미루고 먼저 해주겠다고 말했다. 나는 감사하다는 인사와 동시에 은행원에게도 김영란 법이 적용되나? 책상 위에 커피가 있는 걸 보니 커피를 드시나보군. 다음번엔 커피라도 사와야겠네, 커피는 무얼  드시나? 커피보단 디저트가 나을 수도 있겠다(…)생각했다. 내 일부터 도와주시는 걸 보면 나를 안쓰럽게 보셨나보다. 구멍난 회색 티셔츠가 제 역할을 한 것 같았다. 얏호. 관공서에서의 서러움을 회복했다.

여러 서류에 '동의함'과 ‘김수진'을 영혼없이 반복해 적으면서 은행에 취업한 친구들을 떠올렸다. 서류 작성이 마무리되어가며 더위도 가라앉았고, 호의를 배풀어준 이 분이 친구처럼 느껴질 지경이었다. 작성을 다 끝내고 보니 직원이 수줍은 얼굴을 하고 있다. 그가 묻는다. 카드 하나 만들어주실 수 있나요? 카톡으로 카드 가입 링크가 도착했다. 그런데 직원의 상태메세지에 내 이름이 적혀있다. 그가 내내 친절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내가 안타까워서였을까, 카드실적 때문이었을까, 아내 이름과 내 이름이 같아서였을까.
 
이전 전세 대출을 받았던 은행에도 갔다. 아침부터 관공서에 은행까지 돌고 자리에 앉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몇개의 서류를 들춰보던 직원이 나에게 운이 좋은 분 같다고 했다. 여긴 타로집이 아니라 은행이다. 영문을 모를 이야기에 가쁜 숨이 잦아들었다. 전세 계약을 무탈히 세번이나 갱신하고 있으니 좋은 집인 것 같다고. 창구에서 전세사기 때문에 우는 손님들이 너무 많다고. 오랜만에 무탈한 분을 만나서 기분이 좋다고 했다. 직원은 재차 말했다. 정말 좋은 집이네요. 죄송하지만 무탈한 나도 울음이 터져버렸다. 대가없는 호의를 바라던 마음과 대가를 치르길 바라는 마음 사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