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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색중인 것에 대한 노트

잔인한 생활의 굴레도 끝을 아는 사람에게는 잠깐 타고 내리는 대관람차 같은 게 된다.


Ocells-Todi Soler

쌀방. 방안 가득 쌀이 산처럼 쌓여있는 방. 외갓댁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보이는 방은 쌀방이었다. 그 방에 물건은 살을 푸는 ‘되’ 하나 뿐이었다. 동갑내기 친척과 키만큼 높게 쌓인 쌀산을 미끄럼틀처럼 타고 놀며 쌀을 온데만데 흩뿌리며 놀았다. 쌀에서 뒹굴다 나오면 얼굴에 뽀얗게 쌀가루가 묻어있었다.

외갓댁은 쌀을 포대가 아니라 방 한칸에 쌓아 두고 먹을만큼 쌀농사을 크게 짓는 집이었다. 고양이 손도 빌린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일손이 많이 필요한 농사에 온 식구들은 모내기철, 수확철마다 동원됐다. 농번기에 더위를 먹는 사람은 있었어도 죽은 사람은 없었다. 일은 한겨울에 일어났다. “날이 많이 추운데 가서 밭을 한번 둘러보고 오라“는 할아버지의 말에 할머니는 밭을 보러 나갔다. 할아버지는 따끈한 아랫목에 누워있었을까? 늦은 밤 밭이 무사한 걸 확인하고 돌아온 할머니는 그날 밤 무사하지 못했다. 따뜻하게 데워진 집에 들어서자마자 쓰러져 그대로 돌아가셨다.

대학교 1학년 때 친구들이 농활을 간다고 했다. 농협이라고? 아니 농활. 가서 벼도 심고 새참도 먹고 낮잠도 자고 술도 마시는 거래. 나는 아직도 농활이 무엇의 줄임말인지 모른다. 농부생활? 농촌생활? 여름방학을 맞아 농활 멤버를 모집한다는 친구들의 이야기는 ‘농협은행’을 ‘너무 예쁘네요’로 듣는 일만큼이나 어이없고 웃긴 이야기였다. 잔인한 생활의 굴레도 끝을 아는 사람에게는 잠깐 타고 내리는 대관람차 같은 게 된다.

달력을 보다가 모내기 철인 게 생각나서 쓰고 있다. 엄마한테 전화해서 쌀방 기억을 이야기했는데 괜한 이야길 한 거 같다. 나도 보고싶은데 엄마는 오죽할까. 외갓댁에 가서 쌀 미끄럼틀을 다시 탈 수 있다면 나도 농활 가고 싶다. 그게 뭐의 줄임말이든. 7, Jun,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