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모색중인 것에 대한 노트

강 건너에 두고온 내가 있는 기분 1215-1222

 
1215 sun
MUP 공연 <버틀러와 포스터: 양치기의 근심 Butler and Poster: A Shepherd‘s woes> 보러 다녀왔다. 압구정 역에 내려서 조금 걸었는데 그 길에 본 어느 맨션이 정말 아름다웠다. 벽돌로 쌓은 낮은 건물, 작은 단지, 동과 동 사이에 있는 작은 중정, 바깥으로 느슨하게 열려있는 출입구들. 압구정 한 가운데에 이런 소담하고 아름다운 맨션이 있었다니. 가격은 소담하지 않겠지만 오랜만에 살고 싶은 마음이 드는 집을 보았다.
 
코리아나 미술관. 1층은 대기실로 꾸며져 있었다. 직사각형의 큰 공간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가벽이 있었다. 못 몇개가 박혀있었고 번호가 붙어있었다. 입장 할 때 받은 번호표와 같은 숫자가 붙어있는 못에 옷이나 가방을 걸었다. 공연 시작 시간이 되자 안내자 분이 대기자들을 지하로 안내했다. 열어주신 문으로 다 같이 걸어서 내려갔다. 한계단씩 내려갈수록 온도가 조금씩 낮아졌다. 못에 외투를 벗어두려는 사람들에게 왜 외투를 입는 것을 권했는지 알만했다. 
 
3부작인 이 공연은 2년동안 이어졌고 오늘이 마지막 공연이었다. 나는 첫번째 편을 제외한 나머지 두 편만 보았다. 이번 공연에서도 역시 무대장치가 눈에 띄었다. 벽이자 무대이자 수납장이었던 것이 어느 순간 스크린이 됐다. 그 자리에 첫번째 공연의 모습을 촬영한 영상이 상영됐다.
 
2022년 11월 영상 안의 사람들은 모두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그 안에는 애인도 있었다. 마스크를 쓰고 있어도 알아볼 수 있었다. 아직은 낯선 사람이었던 그가 계속 영상 속을 이리저리 걸어다닌다. 그저 공연을 보는 사람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거나 영문을 모르는 채로 이리저리 움직이는 모습 뿐이었는데 갑자기 눈물이 치밀었다. 바로 뒤에서 공연을 기록하는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었는데 혹여나 우는 장면이 찍힐까봐, 공연을 보고 우는 걸로 오해받을까봐 연신 소매로 눈물을 훔쳤다.

 
우리는 이미 어떤 시절을 건너 왔는데 강 건너에 두고 온 우리가 있는 기분. 여기로 데려와야 하는데 거기에 있는 우리가 너무 행복해보인다. 

 
 

1216 mon
한 주의 끼니를 준비하는 월요일. 밀프랩 다섯 개를 만들어서 냉장고에 넣어두었다. 든든.
 
 
 
 
 

1217 tue
송은미술대전 다녀왔다. 헤르조그 드뫼롱 설계로 알려져서 답사 왔던 게 마지막이니까 2년만인가. 하여튼 집에서 까마득하게 멀어서 거의 해외여행 다녀온 기분이다.
 
애인은 1층에서부터 아는 분을 만나서 한참 인사 나눴다. 작품이 정말 많았다. 혜인이와 같은 이름의 작가가 있었는데 그 작품 앞에 조금 오래 서 있었다. 혜인이가 <나를 기른 냄새>에 쓴 수원역 성매매 집결지에 관한 글이 생각나는 그림이었고, 냄새가 풀풀 나는 그림이었다. 작업 초기부터 많은 이야길 들었던 얄루 님의 신인호, 루이스 부르주아 생각나던 오묘초 앞에도 조금 오래 서 있었다. 
 

무빙씨어터 21번째 영화는 페데리코 펠리니 <달콤한 인생>. 영화보면서 기록하는 노트에 적은 거라곤 이거 뿐이다.
구찌-펠리니
우영미-박찬욱???
 
기승전결 없이 에피소드로 구성된 영화라 집중력이 떨어져도 볼만했다. 무빙씨어터 상영 횟수를 일주일에 두번에서 한번으로 줄였다. 본 영화를 익히고 소화할 시간이 필요한데 일주일에 두편은 보는데에만 급급하다. 연말이라 이런저런 약속들이 많아진 탓도 있고.
 
 
 

1218 수
주간회의 있는 수요일. 일기를 쓰려고보니 기억이 없어서 회의록 들춰봤다.
2024년 사업 리뷰
2025년 사업 계획안 쓰기
이 두사안으로 대표님이랑 설왕설래 한 거 기억났다. 정신 건강을 위해 이 날을 기억에서 지운 것 같은데 일기로 다시 소환됐네. 일기 과연 내 인생에 도움 되는게 맞는지? 

이 날은 강덕구 평론가 신간 『한 움큼의 외로운 영혼들』 들춰본 기억만 남았다. 그 책에서 꼭 확인해야하는 것이 있었다.
 
 
 

 
 
 
 
 

1219 목
책방에 두 명의 산타가 다녀간 날. 
 
첫번째 산타는 철학 선생님. 연말이면 어김없이 정서한 편지를 A5종이에 꼭 2장을 인쇄해 봉투에 담아 건넨다. 이 편지 덕분에 나는 매년 한해를 유순하게 마감한다. 선생님은 동봉된 선물에 내가 부담을 느낄 새라 편지에 아도르노를 인용했다. "현대 문명에 그토록 냉소적이었던 아도르노가 왜 인간에게 선물이 꼭 필요하다고 거듭 말했는지 아셔요? 자신을 완전하게 행복으로 채우는 것을 혼자서 정확하게 발견할 수 있을만한 상상력을 지닌 사람은 우리 가운데 아무도 없기 때문이랍니다. 2024.12.17 온기를 담아 K"

5년 전 철학 선생님으로 소개 받은 후 이렇다할 접점이 없어 따로 뵙거나 인사드릴 일이 없었다. 그럼에도 이 관계는 사라지지도 않고 그렇다고 특별히 가까워 지지도 않았는데...그러고보니 나는 선생님께 이 정도 관계에서 할 수 있는 낭만적인 인사의 방법을 배우고 있는 것 같다. 
 
두번째 산타는 정말 뜻밖의 사람이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들어왔는데 매니저님이 문앞에 이게 놓여있었다며 책보다는 작고 핸드폰보다는 큰 무언가를 건네주셨다. 나는 "매니저님을 흠모하는 누군가가 두고 가신게 아닐까요? 뜯어보세요!" 하며 주책을 떨었고 아름다운 우리 매니저님은 이제 그런 플러팅은 정말 피곤하다는 듯이 선물을 내쪽으로 떠밀었다.
 
주책 떤 것이 뻘쭘하게 그 선물은 나에게 온 것이었다. 선물을 두고 간 사람은 지인의 지인으로 몇번 스친 것이 전부였던 사람이었다. 그 시기에 어쩌다 그의 블로그를 알게 되었다. 오랜시간 생활의 기록들이 쌓여있었다. 예민한 자신 뿐아니라 그런 자신에게서 상대를 보호하려고 예의를 갖추느라 애쓰는 사람으로 읽었다. 이상하리만치 글을 잘 썼다. 올 여름 의지할 친구가 필요했지만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을 때 그의 블로그를 읽었다. 그렇게 여름을 보내고 가을이 됐을 때, 책방에 방문한 그가 내 블로그를 보고 있다고 고백했을 때 나는 초면이나 다름 없는 그 사람 앞에서 한참을 울었다. 선물과 같이 들어있던 엽서에 역시나 여름과 가을 언저리의 이야기가 적혀있었다. 부던히 일기를 쓰며 무언가를 지켜내려 애썼던 것을 그가 알아봐준 것 같아서 편지를 안고 한번 더 울었다.
 
 
 

 

1220 금
출근길에 리치몬드 들러서 선물용으로 슈톨렌 사려고 했는데 이미 품절이었다. 조금 더 비싼 구움과자 샀다. 동료들과 먹을 빵도 조금 샀다. 세미 님께 빌린 앰프 돌려드릴 겸, 책 계약 논의할 겸 도미노 사무실 들렀다. 
 
밤엔 『미술 사는 이야기』(유지원, 마티)읽기 시작했다. 유지원 님은 북서울시립미술관에서 진행했던 캐시박홍 북토크 때 양효실 선생님 통역으로 처음 뵀는데, 당황스러울만한 상황에서도 매우 유쾌하셨던 모습이 인상깊었다. 돌아오면서 A언니랑 행사가 매끄럽게 진행된 건 유지원 님 덕이라며 쫑알 거렸던 기억이 난다.
 
신생공간이 마구 생겨나던 시기를 기억하고 있는사람이라면 즐겁게 읽을 책이었다. 나는 ‘더 스크랩’을 기점으로 그 시절을 기억하고 있는데 책에서 근 10년동안 이어진 신생공간의 흐름 안에서 그것이 어디쯤 있는지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 좋았다. 재미있어서 다 읽고 자고 싶었는데 …
 
 
 

 


1221 토
눈 뜨자마자 대충 음식 차려 먹으면서 어제 읽다 만 『미술 사는 이야기』 읽었다. 오후 약속까지 시간이 조금 남아서 운카페에서 애인 기다리면서 나머지 다 읽었다. 지난 주 mup전시에서 만난 큐레이터 님이 알려주신 미카 로텐버그 전시보러 현대카드 스토리지로 이동했다. 가는동안 애인이랑 신생공간 이야기 한참 하고 어떤 방식의 프로그램이 생길까? 어떤 프로그램이 주목받을 수 있을까 이야기했다. 이 책 이후의 이야기들이 궁금하다.
 
<NoNoseKnows>(2015)
<Cosmic Generator>(2017)
<Spaghetti Blockchain>(2019)
전시에 영상작업 많으면 힘들어지는데 미카 로텐버그 영상은 모두 다 끝까지 봤다. ASMR을 방불케하는 씨즐과 팅글의 향연. 
 

 
 
1222 일
일요일. 오전에 집안일 해두고 집앞 카페에 나왔다. 맛 좋은 필터 커피 파는 곳. 이곳은 필터커피를 주문하면 커피를 자리로 가져다주시면서 원두 소개와 함께 오늘의 추출 상태를 친절하게 설명해주신다. 바리스타 선생님과 눈을 마주치면서 그 이야길 듣는 게 좋다.

커피 마시면서 써둔 원고 중에 쓸만한 게 있나 싶어서 열어보았는데 그거 정말 못할 짓이더라. 과거의 내가 쓴 글을 맹렬히 째려보다가 지쳐서 집에 돌아왔다. 뭘 그렇게 열심히 엉망으로 썼는지. 원고 추려보면서 본업하면서 집필까지 가능한지 가늠해보려고 했는데 과거의 나와 화해부터 해야겠다.
 
 
 

 

1223 월
일본에서 잠시 들어온 은별님, 상우씨 만났다. 올 여름 나에게 중요한 무언가를 가르쳐준 사람들. 빚진 걸로 치면 내가 갚을 게 제일 많은데 두분 다 손에 무언가를 들고 오셨다. 시간이 오래 지나도 올해를 떠올리면 두 분의 얼굴이 선명히 떠오르지 않을까. 저녁먹는동안 이야기 많이 했는데 메모장에 이런 게 남아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
미시마 유키오
나쓰메 소세키 갱부
황정은
레이먼드카버
Orthodo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