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 December
어젯밤에 이 시국과 관련해 별도의 큐레이션 서가를 만들어둬야하는지 고민하다 잤다. 얼레벌레 출근해서 혜인 북토크에 도움이 될까 싶어서 다이앤 애커먼 『감각의 박물학』 다시 살펴보았다. 곁에 있던 매니저님이 차를 권했다. 함께 차를 마실 때마다 내가 청차에 유독 반응이 좋았다며 이음의 청차를 내어주셨다. 리산. 올해 나를 돌본 가장 따뜻한 무언가를 마시면서 도움을 준 많은 얼굴들을 떠올렸다. 그 분들께 리산을 선물하면 좋겠다.





10. December
저녁 늦게 방문해주신 한 손님이 물었다. "책을 잘 읽지 않는 사람한테 선물하고 싶은데 이 두 시집 어떨까요?" 손님의 양 손에는 세미 시인의 『오늘 사회 발코니』와 세계 시인선 한 권이 들려있었다. 두 책도 물론 추천표시를 큼지막하게 달아둔 책이긴 했지만 마침 그때 읽고 있던 시집을 권해드리고 싶었다. 『멸종이 확정된 동물 』 백인경. 봄날의책 신간 시집이라 후루룩 훝어보다가 <뒤풀이 건배사> 라는 시를 보있기 때문인데…
무빙 씨어터 Moving Theater 열 아홉번째 영화. 코엔 형제의 <파고>. 몇달 전 전시 뒤풀이 자리에서 우연히 만난 여자 영화 감독님이 <파고>를 너무 좋아한다며 자기는 전 연인을 세탁기에 넣어서 죽이는 장면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낯선 사람들과 스몰토크 하느라 피곤했는데 그 말에 남아있던 약간의 에너지도 모두 바닥났다. 뭔가 잔인한 장면이 나오나보군 싶어서 내 의지로 그 영화를 보는 일은 없겠다고 생각했었는데….

11. December
오전에는 책에 실을 만한 원고들이 있는지 살펴보면서 시간 보냈다. 지난 작가전에 쓴 글들 다시 꺼내보다가 수치스러워서 혼났네. 참 부지런히 이상하게 썼다. 과거의 나랑 싸우다가 도저히 끝날 것 같지 않아서 친구들 블로그 순회 돌았다. 매주 산책하듯 놀러가는 몇개의 블로그를 주룩 열어두고 읽다가 ㅁㄹㅂ님이 이웃공개로 올려두신 일기를 보았다. 사실 올 여름 사건과 관련해선 스위치를 꺼두고 지냈다. 특히 최근에는 혹시나 했던 게 역시나였다는 걸 알게된 후로는 마음도 한결 가벼워졌다. 대처해야될 일이 생기면 변호사님이 연락 주실테고...대응은 그때 하면 된다. ㅁㄹㅂ 님이 정성스럽게 글을 써주신 게 처음은 아니었지만 나도 여러 이유로 신경 꺼버린 일을 붙잡고 애써주시는 분께 감사하고 또 죄송했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고맙다는 댓글을 남겼다. 나는 사랑과 용기의 힘을 믿을 것이고 기다림을 배울 것이다. 우리는 이번 일로 소중한 것은 아무것도 잃지 않았고 이 일이 아니었다면 절대 몰랐을 것들을 얻었다.
저녁은 플랏엠에서 정현 실장님, 규엽님과 식사. 집과 플랏엠 사무실이 아주 가까워서 집에서 라따뚜이 만들어서 들고 갔다. 세시간 동안 패딩이랑 호텔 이야기했는데 뭐가 그렇게 웃겼는지 모르겠네. 오늘도 사케를 내어주셨는데 나 술 중에선 사케가 가장 잘 받는 거 같다.




12. December
눈뜨면 뉴스 속보부터 보는 나날들. 속보로 뜬 대국민 담화랑 조국 대표 실형 받은 것까지 보고 출근했다. 며칠 전 비상 계엄을 보도한 외신 기사를 몇개 봤는데 Reuters에서 4일에 발행한 기사 <South Korea’s short-lived martial law: How it unfolded and what’s next>가 대단했다. 비상계엄 선포부터 국회 봉쇄까지 6시간동안 일어난 일을 구체적으로 시각화 했다. 국회의사당을 중심으로 헬기가 착륙한 운동장은 어디에 있는지, 경찰 바리케이트가 어디에 쳐져서 입구가 봉쇄됐는지, 계엄군의 진입 경로는 어딘지 장소별로 사건의 경위가 표시돼있다. 심지어 탄핵 철자와 역대 대통령의 지지율까지 모두 시각화 되어 있다 .실시간으로 기사를 보고 있었으면서도 나는 대부분의 정보를 흐릿하게 그려넣고만 있었다.
오후에는 내일 있을 『나를 기른 냄새』 북토크 준비하면서 보냈다. 책을 한번 더 읽고 질문들을 적어보았다. 특별히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지 물었을 때 혜인은 책의 말미에 실린 <환상의 섬, 제주>에 관해 야기할 시간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2023년의 이혜인, 1937년대의 양산하, 2020년의 후각 연구자 시셀톨라스가 교차하며 등장하는 글. 이 글 읽으면서 이런 생각하느라 금새 피곤해졌을 이혜인 생각하다가 애틋해지고 그랬는데. 내일 쓸 문향지 40개 만들었다. 접히는 면에 오시까지 손수 넣다가 나도 피곤해져서 퇴근했다.
Sissel Tolaas:22 - Mosecular Communication
Roni Horn: Saying Water











13. December
혜인의 출간을 기념하며 인간 응원봉이 되어보겠다는 마음으로 북토크 사회를 맡았다. 사회 잘 못보면 친구는 오늘까지만 해도 된다고 했는데...수언이가 웃겨줘서 다행히 절교는 면한 것 같다. 나에게 없는 면을 가진 친구들. 너희가 있으면 나는 부족한 게 없는 사람이 된다. 고마워. 북토크 마치고 어느새 책방의 뒤풀이 장소가 된 술집에 혜인의 친구라는 교집합을 가진 사람들이 모였다. 비슷한 또래의 여자친구들만 있는 자리가 참으로 좋았다. 초면이라곤 믿을 수 없는 수위높은 이야기들이 오갔다. 혜인이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선물로 받은 라벤더를 한묶음씩 나눠주고 갔다. 교집함인 혜인이 떠나고 우리도 금새 흩어졌다.






14. December
우리의 목적지는 찾기를 위한 끊임없는 움직임에 고정되어 있습니다. 『딕테』 차학경, 문학사상
매니저님의 연차로 오랜만에 주말의 책방을 맡았다. 탄핵소추안 표결이 있는 날이다. 표결 결과가 나오기 전까진 한가하겠지. 한참 품절이었던 차학경 『딕테』가 드디어 들어와서 조금 들춰보았다. 글도 안들어오고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아서 화면 반절에는 뉴스 생중계를 띄워두고 반절에는 북토크 리뷰 쓰기로 했다. 카메라를 열어보니 어제 행사 사진만 230장이 들어있다. 첫 책을 낸 친구, 그리고 친구의 응원봉으로 나선 나를 알고 매니저님이 혼신의 힘을 다해 찍어주신 것 같았다.